밀알미술관 특별기획전 <빛은 원동에서> (영상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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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9-18 11:37 조회10,04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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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원동에서
성현경
밀알미술관 학예실장
예술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 해왔다. 예술은 훈련된 능력이나
매체의 숙달을 의미 할 수 있는데, 간단하고 깊이 있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언어의 개발, 효율적인 사용을 간단히 언급 할 수 있으며, 감정, 생각, 관찰을 표현하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또한, 예술작품의 목적은 영적, 정치적 또는 철학적으로 동기 부여되어 그 기능을 나타낸다.
988년 정교회를 받아들임으로써 예술이 시작되었던 러시아는 서유럽에 비하여 늦게 예술의 형태를 갖추었으나, 크고 작은 변화를 통하여 큰 성장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으며 러시아 예술만의 특색을 갖추었다.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예술은 슬라브 민족과 정교회 문화가 강한 수도권을 위주로 발전되었는데, 남하 정책으로 시베리아를 넘어 동아시아로 영토를 확장하는 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다양한 민족의 문화를 접하게 되었고 이후 지역 미술이 새롭게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60년 베이징 조약을 체결로 극동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부동항과 국경의 고수를 위해 로모노소프(러시아) 왕조에 이어 소비에트 정부는 군대와 이주민을 보내어 연해주를 완전한 러시아 땅으로 자리를 잡게 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연해주는 오랫동안 동아시아 지역의 변방으로서 북방 이민족들의 영토였다. 우리에겐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고, 중국 왕조의 오랜 지배를 받기도 했다. 원주민들은 여진족-만주족이었고 나나이족과 같은 소수민족도 있었다.
러시아 정치권은 군사, 지리, 자원의 이권의 완전한 확립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자국민을 이주시키며, 우크라이나인과 소수민족들을 다양한 이유로 이주시킨다. 사실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수교 역사는 이제 갓 30년을 넘어섰지만, 역사 기록을 볼 때 한인의 러시아 이주 역사는 이미 150년이 넘었다. 스탈린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명령이 없었다면 연해주 내 한인의 비중이 약 20%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이주민으로 시작된 극동, 연해주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는 언덕 위에 형성된 도시인데, 곧은길이 거의 없다. 위에서 아래로, 구불거리며 험준한 길이 대부분이다. 이 혼란스러운 곡선은 인생에 있어서 곧 어려움이다. 연해주의 삶은 명목상 러시아의 영토나 명확한 민족성의 개념이 없다. 사회주의 체제로 인하여 더 광범위한 인종들이 모이게 되었고 주인의식도 없는 척박한 땅에 세워진 혼돈의 삶이었다. 전쟁, 강제이주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고된 삶으로 도시가 시작되었다. 힘든 삶이었기에 문화적인 혜택도 없었다. 그래도 중앙에서 파견된 군사, 정부 파견자 가운데 일부 예술가와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후에 그들의 노력으로 이주민 자녀들 가운데 예술교육을 받아 지역 예술가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말, 연해주에도 화가협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1938년이 되어서야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유는 38년 이전까지 연해주에 독립적인 행정자치기구가 형성되지 않았고, 1920~1930년대의 고학력 원로 화가들은 이주되었다는 이유로 눈에 띄는 역할을 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일부 화가들은 숙청되기도 했고 도시에서 적출되기도 했다.
교육학자이자 사회활동가인 V.V.Bezrodny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연극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연해주로 이주한다. 그는 지식이 풍부하고 예술적 문화적 소양이 높은 사람이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고등 미술교육이 드물었는데, 대학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전문성과 비전을 가졌던 그는 연해주에서 지역화가 연합과 예술 교육의 확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의 노력으로 1943년에 소비에트 인민 교육위원회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 미술학교가 설립인가를 승인받았다. 국가에 정식으로 인가된 첫 미술교육 기관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해주 화가협회의 조직력과 작품은 질적으로 새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지역 전시회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블라디보스토크 미술학교 졸업생들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1950 년대 중반, 연해주 화가연합에 새롭고 밝은 시대가 시작되었다. I.V. Rybachuk, K.I. Shebeko, K.P. Koval, N.A. Mazurenko, S.F. Arefin, V.N. Gerasimenko, T.M. Kushnareva, V.M. Medvedsky, V. M. Sviridov, B. F. Lobas, A. V. Teleshov 등, 전문성을 가진 작가들이 등장한 시기였다. 평론가 V.I.Kandyba는 이 시기를 ‘이제 시작하는 젊은 화가들이 연해주라는 땅에 뿌리를 둔 힘의 형성과 축적의 기간’으로 정의했는데, 극동 예술 발전에 이바지한 초기 화가들의 역할은 매우 컸다.
지역전시가 연해주 예술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1950년대 후반의 특징이다. 풍경화가 주된 역할을 하고, 연해주 역사와 지역의 고된 삶(연해주-선원, 어부, 광부의 땅), 북부지역, 추코트카, 캄차트카, 쿠릴에 대한 연구가 그림의 소재로 추구되었다.
많은 연해주의 작가 중에서도 I.V. Rybachuk과 K.I. Shebeko는 극동뿐만 아니라 러시아 예술에서도 ‘북부 테마’의 개척자로 여겨졌는데, 2014년, 연해주기념홀에서 열렸던 VTOO '러시아화가연합’의 전시회 ‘세 거장들’은 ‘북부 테마’가 예술에 있어서 현대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주제임을 각인시켜 많은 예술가들의 관심과 함께 북부지역 자연과 사람들을 작품에 반영하고 특별한 회화적인 효과를 찾도록 일깨웠다.
연해주 화가들이 공통으로 중요시한 또 하나의 주제는 쉬코탄 테마였다. 1960년대 러시아 국내 예술에 대한 관심과 관련하여 최신 연구의 주제가 된 이 주제는 연해주 화가 20명 이상의 작품과 관련이 있으며, 10년 이상 지속하여 쉬코탄 그룹의 존재에 자극을 주었다. 풍경화, 초상화가 수십 점의 그림으로 구체화 되었으며, 그 주요 내용은 ‘극동의 자연- 평범한 일상의 사람과 자연과 강한 연대성’이었다. 1960년대 경향으로 쉬코탄 그룹의 작품에서 보인 거친 스타일은 짧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말까지 소비에트 화가들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1962년 극동예술교육대학(현.국립극동예술대학)이 설립되었는데, V.A.Goncharenko가 미대 초대 학장을 맡고, 곧 V.N.Doronin과 K.I.Shebeko 등, 다수 우수한 교수진들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되어 교편을 잡았다. 이후 현재까지 400명 이상의 학위자가 배출되었고, 그중 많은 수가 러시아연방 화가연합회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일부는 러시아연방 명예화가, 문화예술부분 공훈자 및 저명한 교수와 학자가 되었다.
이번 연해주 출신의 지역 미술을 대표하는 원로작가부터 신인작가들의 작품으로 기획된 <빛은 원동에서> 전시는 그동안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연해주의 역사, 풍경, 지리 등 지역 문화를 그림으로 알게 해주었다. 현재에도 연해주 지역의 화가들은 지리적인 불리함이나 관심도가 낮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꾸준히 창작과 연구 활동을 하여, 다양한 형태의 전시회를 연해주 지역뿐 아니라 러시아 전역과 해외까지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그간의 기록들이 모여서 이 자리에 전시된 것은 여러 가지로 큰 의미가 있는 전시이며 앞으로 러시아 미술에 대한 관심과 발전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