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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창연

전시구분 소장기획전 전시장소 밀알미술관
전시기간 2016.11.27 ~ 2016.12.21 장르 회화
참여작가 함창연

 

 

 

 

 함 창 연

1960년대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본 전시는 함창연이 폴란드 유학에서 돌아온 시점(1959년 후반기)을 기준으로 그의 1960년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조명한 전시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주제와 형식에 따라 총 5개의 범주: <미술가 함창연; 자화상>, <폴란드 유학시절의 회상>, <인물>, <사회비판적 사실주의>, <표현주의적 모노타이프 시리즈>로 구분되었으며, 사진을 포함한 일부 관련 자료를 함께 전시함으로서 작가이자 교육자로서의 함창연의 예술세계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북한의 미술은 널리 알려진 대로 남한에서 전개된 순수한 미술 활동 양상과는 크게 다르게 체제에 부응한 예술양식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사회주의 이념의 찬양과 선전을 그 내용으로 하기 위해 북한 정부 수립 초기부터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문화예술정책으로 채택하여 작품에 이념이 강조되고 민족적인 형태를 고무한 작품을 미술로 인정하고 있다. 

1950-70년대의 북한 사회는 김일성의 통치 아래 각 분야의 예술가들이 적극적으로 요구되던 시대였다. 전쟁으로 피폐된 도시는 ‘사회주의’이념 아래 유토피아를 꿈꾸며 스탈린 양식의 영향을 받은 건축과 조각들로 새롭게 채워졌고,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조각, 정치 풍자화(만화), 선동용 포스터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대중에게 쉽고 친근하게 다가 갈 수 있도록 민족적인 내용과 기법으로 선동적인 혁명성을 내용으로 하는 미술작품들이 강조되어 이후 조선화 기법의 탄생과 주체미술로 이어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함창연은 매우 우수한 성적(1959년 기준으로 몇 년간 바르샤바 미술대학교에서 최우수 성적의 졸업자가 없었음)으로 바르샤바미술대학을 졸업하여 6년간 폴란드 유학생활을 마치고 1959년에 귀국한다. 당시 귀국길에 오른 그의 가방에 각종 판화 도구들과 자료들뿐이었다. 

귀국과 동시에 그는 모교인 평양미술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어 학생이 아닌 지도자로서의 후기 활동을 시작한다. 함창연이 귀국한 1960년대 이전까지는 북한미술의 1세대인 전쟁이후의 작가들, 즉 주로 일본에서 유학하여 인상주의 영향을 받은 월북한 작가들과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한 작가들로 기반이 형성된 교육이 이루어 졌었다면, 이후는 함창연과 같은 소비에트권역에서 유학하여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로 새로운 북한 미술계층이 형성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함창연은 스승으로서 많은 것들을 후학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였다. 교육자로서 자질과 품성을 타고난 그는 스승이었던 황헌영과 배운성을 닮기를 노력하였다. 실제로 성격도 웬만해서는 화를 낼 줄 몰랐으며, 원리적으로 접근하는 교수법을 고수하고 평생 손에서 책이 떨어지는 적이 없이 연구를 거듭하였다. 

함창연이 강의하던 수업은 매번 앞자리에서 청강하기 위해 학생들이 잦은 다툼이 있었고, 2칸 밖에 없던 자택은 늦은 시간까지 그에게 배우기를 원하던 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는 주 전공이던 판화 뿐 아니라 각종 회화 실기와 이론 수업을 가르쳤으며, 원서 강독은 물론 탁월한 외국어 실력으로 소비에트권으로 유학 가는 학생들의 러시아어 수업을 지도하기도 했다. 또한 부족한 교재 현실을 직시하고 10권이 넘는 미술 서적과 소논문 20개, 사전용어 집필 등 다수 연구 자료를 출판하였다. 이렇게 교육자로서 그의 후기가 충실 할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의 부족한 미술현실을 직시하고 가르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표현주의 양식이 가득한 그의 작품이 북한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1970년대 이후에는 그 역시 1세대의 작가들처럼(선전화, 포스터만 만들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에 후학증진에 매달린 1세대 교수들은 평양미대를 설립하고 학교가 자리 잡히도록 노력했음) 더욱 더 교육자이자 학자로서의 삶에 집중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교육자로서의 후기 활동을 이어가던 중에도 개인적으로 틈틈이 작품을 남겼는데 동판화 대표작이 많았던 유학시절에 비해서는 석판화나 동판화는 재료의 구입이 용이하지 않아 주로 목판화 작업에 집중했고, 인물화를 좋아해 초상화와 소묘를 주로 그렸으며, 다른 작가들과 함께 명소와 농촌을 찾아다니며 민족적인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후기 대표작은 <리발(1962)>, <수중다리(1969)>, <산양(1973)>, <압록강에서(1981)>, <비핵지대, 평화지대(1982)/1987년 모스크바 국제정치포스터 특별상>, <쌍둥이(1987/파리 유네스코)>, <조선은 하나다(1988)> 등이 있다. 

함창연의 작품세계를 주제적으로 분류하고 한가지의 사조로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독특하게도 한 사람이 모두 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완성도 높은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한 표현주의와 함께 사실주의적인 내용의 작품을 했는데, 시대적으로 요구되던 선전화를 하면서도 서정적이고 사의적인 감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늘 남다르다는 평을 듣는데 탁월한 구성능력과 관찰력, 정확한 소재의 이해와 주제의 분석과 함께 각종 분야를 아우르는 기법으로 판화에서 회화적인 요소를 보이는 한편 회화에서 판화적인 기법의 표현을 보여준다. 

 

흔히 북한의 판화가로 많이 알려진 함창연은 정확히 미술가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 작가로서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공판화(실크스크린)를 제외한 모든 판화 기법을 익히고 수많은 대작을 남겼으며, 그 외에도 유화, 수채화, 초상화, 드로잉 분야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작품을 했다. 그리고 학자로서 미술사 연구, 교과서 집필, 미술용어 백과사전 편집을 했고, 동시에 교육자로서 미대 교수를 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등 대부분의 미술 분야를 섭렵하였다.

 

최초로 국제무대에서 한국미술을 알리고 교육자로서의 그의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함창연은 북한 사회에서 공훈예술가의 업적 정도로만 치하되었다. 한국근대미술의 선구자였던 그의 무덤은 단촐한 비석 하나만 세워져있어 예술성 보다는 정치적인 성향이 더 중시되는 북한미술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밀알미술관 학예실장/ 성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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